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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이 칼럼] "스며들다"

기사승인 2023.05.11  09: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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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월 28일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려는 게 가장 컸다. 그리고 배드민턴 빅토리아 사이트에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 보조 코치를 구하고 있었다. 그 길로 당장 헤드 코치가 여는 레슨 수업에 참여했다. 

빅토리아는 작은 섬이라 그런지 이 지역 안에 코치 수가 적다.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도 적은데, 실제로 활동하는 인원은 현재 3명밖에 없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꾸준히 배드민턴을 가르치면서 유소년이 양성되고, 그중 실력이 출중한 선수들은 주 혹은 캐나다 대회에 출전한다. 예전에는 BC주가 배드민턴으로 강한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중상위권 정도 레벨이라고 한다. 

   
▲ 배드민턴 빅토리아 로고
여러 가지 빅토리아 배드민턴에 관한 정보를 찾다 보니 체육관에 도착했다. 오늘 헤드 코치가 여는 수업은 중급 레벨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C. D조 정도. 이 수업을 많이 들어봤지만 크게 힘든 점은 없었다. 게다가 내 목적이 다른 데에 있었기에, 그 집중력만 흐트러지지 않으면 되겠다 싶었다. 

수업이 끝나고, 코치에 대해 질문을 하며 자연스럽게 1:1 인터뷰가 진행됐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 관심 있는 일 이다 보니 아무리 영어로 말하는 게 어려워도 아는 단어가 많아서 그런가? 말이 술술 잘 나왔다. 다행인 건 꽤 자주 본 코치라 내 성격, 실력 모두 잘 알고 있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채용 결정이 났다.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였으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보니, 준비해야 할 서류가 좀 있었다. 기본적인 일반 범죄, 성범죄 이력을 체크한 서류가 필요했다. 경찰서 가서 서류를 받아왔고 5일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배드민턴 빅토리아로 넘겨주고 다시 5일. 일은 시작했지만. 아직 공식 등록이 되지 않았다. 역시 많이 느린 캐나다. 아직 배달이는 이 느림의 미학에 적응 중이다. 

기다리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첫 출근 소식이다. 장소는 고든 헤드 중학교(Gordon Head Middle School). 2시간 수업이었고 약 25~30명의 학생이 참여한다고 했다. 

굉장히 긴장됐다. 당일 연락을 받고 준비를 많이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영어로 하는 수업이라 더 떨렸다. 아이들이 내 말을 잘 알아들어 줄까. 같이 일하게 될 코치들은 어떨까. 다행인 건 이날 같이 일할 코치 2명 중 한 명은 이미 알고 지낸 지 좀 된 친구였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을 안고 집 앞 10분 거리에 있는 이 중학교로 향했다.

가는 동안 잠시라도 언어 스위치를 영어로 바꾸기 위해 로컬 라디오를 틀었다. 평소 장거리 운전을 할 때는 라디오 듣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영어가 잘 안 들리는데, 라디오 음질마저 좋지 않아 귀에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10분 운전이니, 참아보기로 한다. 

10분간 광고와 날씨 이야기만 듣다가 학교에 도착했다. 너무 빨리 왔다. 때는 저녁 6시 15분. 해는 이미 졌지만,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었다. 처음 와보는 중학교라 체육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헤드 코치는 그냥 가면 기존 코치들이 있을 테니, 잘 확인하고 일해보라고만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 방치. 난 이 캐나다라는 나라에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건물만 보고 체육관을 알 턱이 있나. 

때마침 한쪽 구석에서 한줄기 빛이 보였다. “You wanna come in?”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영어에 “No, Not yet.”이라고 답했다. 그쪽이 체육관인지도 모르겠고, 다른 학생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때 한 학생이 그 방향으로 들어갔고, 다시 문이 활짝 열렸을 때 그곳이 체육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당탕 첫 출근기다. 

   
▲ Gordon Head Middle School Gym
6시 30분. 학생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고 수업 준비는 모두 마쳤다. 눈치껏 봉을 세우고, 네트를 치고 셔틀콕을 준비했다. 다행히 같이 일하게 된 코치들이 너무나 친절했고, 다른 한 코치도 대회 때 만난 친구라 어색함이 덜했다. 더군다나 말이 많은 친구라 첫 만남에 이미 그 코치의 대학교 생활까지 공유할 수 있었다. 평소엔 말 많은 걸 싫어하지만, 이렇게 어색할 땐 자기 이야기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맙던지. 

코치들과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다음은 학생들과 인사할 차례. 28명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란다. 그것도 영어로. 예상은 했지만, 준비해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Hi, Everyone. My name is Tory. Nice to meet you guys.”

맞나? 잠깐의 정적 후에 환영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경계하는 걸까.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온 아시아인이라 학생들이 놀랐나.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모르겠다.

그러고 있는데 옆에 친하게 지내던 코치가 나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해줬다. “이 코치는 한국에서 코치 경력이 있고, 앞으로 우리와 함께할 빅토리아 코치야.” 별거 아닌 문장이었는데, 그 한 문장으로 학생들에게 나에 대한 이해가 많은 도움이 된 듯 보였다. 

(다른 이야기. 학교 다닐 때 배운 “Let me introduce my self”라는 말을 캐나다 온 지 1년 차 때 자기소개 첫 마디로 썼다가 친구들의 그 이상한 눈초리를 잊지 못한다. 나중에 물어보니, 너무나 번역 톤 문장에 자기들은 처음 들어본 문장이라고 한다. 그 이후로 이 문장을 쓰지 않는다)

짧은 자기소개 이후에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됐다. 15세 미만의 학생들이 대부분이다보니, 체력 훈련에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필자도 처음 해 보는 훈련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몇 번 따라 해보고 필기도 해 놨다. 후에 캐나다 코치 자격증을 따면 써먹어도 될 프로그램이라 생각했다. 

한 시간의 체력 훈련 이후 라켓을 들고 각자 짝을 지어 스트로크 훈련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돌아다니면서 어떤 식으로 코칭을 하는지, 학생들의 실력은 어떨지 관찰했다. 오늘 첫 출근이기에 그렇게 지켜보면서 슬쩍 이 무리에 끼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다른 코치들은 내게 좀 더 적극적인 코칭을 요구했다. 한국과 다른 배드민턴 코칭 방식은 어떤지 궁금해하기도 했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인사도 하고 얼굴도 익혀보라고 주문했다. 말 그대로 이 무리에 “스며들어봐”였다. 

용기를 내어 몇 명의 어려 보이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라켓 쥐는 방법을 알려주고 공을 직접 띄워주면서 수업을 필자도 이끌어봤다. 짧고 부정확한 영어에도 학생들은 내 코칭을 들어주고 비슷하게 해보려고 노력했다. 기특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라면서 질문도 하고.

그렇게 캐나다 배드민턴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박병현 객원기자 sportsme4@gmail.com

<저작권자 © 배드민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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